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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죽음의 수용소에서: 줄거리, 교훈, 책속으로

by thegreatmerchant 2025. 3. 16.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음의 수용소에서

 

1. 줄거리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그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참혹한 경험을 담고 있다. 프랭클은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비인간적인 대우와 극한의 고통을 겪었다. 이 책은 그가 수용소에서 목격한 인간의 비극과 고통, 그리고 그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이야기한다.

프랭클은 수용소에서의 삶을 통해 인간이 극한 상황에서도 어떻게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그는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그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그리고 다른 이들의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인간의 정신적 힘과 의지를 강조한다. 이 책은 단순히 고통의 기록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프랭클은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해, 인간이 고통을 겪을 때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그는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이는 그가 심리학자로서의 통찰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책은 단순한 생존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한 여정이기도 하다.

 

2. 교훈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준다. 첫째, 인간의 존엄성과 의미를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프랭클은 수용소에서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작은 고통이나 어려움에 대해서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둘째, 고통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프랭클은 고통이 단순히 부정적인 경험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더 깊은 이해와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어려움과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셋째, 인간의 의지와 선택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프랭클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를 고민하게 만들며,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인간의 연대와 상호작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프랭클은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해, 서로를 지지하고 도와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우리가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결론적으로,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단순한 생존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탐구하는 깊이 있는 작품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프랭클의 경험은 우리에게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긍정적인 태도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3. 책속으로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확실하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정말로 성공이 찾아온 것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성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실존주의의 중심적인 주제와 만나게 된다. 즉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삶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는 없다. 각자가 스스로 알아서 이것을 찾아야 하며, 그 해답이 요구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약 그것을 찾아 낸다면 그 사람은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계속 성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플랭클 박사는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정신의학에 보면 소위 '집행유예 망상'이라는 것이 있다.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유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시적인 생활을 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일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수감자들의 정서가 완전히 메마르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 때 한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내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자기 시를 통해서 노래하고 ,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다.

내면세계를 극대화 시킴으로서 수감자들은 멀리 과거로 도피해 자기 존재의 공허함과 고독감 그리고 영적인 빈곤으로부터의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며 과거의 일들을 회상했다.

수용소 생활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은 일종의 소극적인 행복이었고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상대적인 행복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내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의사로서 내 동료들을 돕다가 죽는 것이 그 전처럼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노동자로 무기력하게 살다가 죽는 것보다 확실히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과 어떤 일이든지 앞장서서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것은 운명이 자기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운명에 영향을 주는 일을 피했고 대신 운명이 자기에게 정해진 길을 가도록 했다. 게다가 심각한 무감각 현상이 팽배해 있었다. 무감각은 수감자들의 감정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수용소에도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거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잇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수 없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제공한다.

기대를 갖기 위해 때때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미래(그자신의 미래) 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상황도 견딜 수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 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해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의 경험, 이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하리!"

경험뿐이 아니다. 우리가 그 동안 했던 모든 일, 우리가 했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생각들,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고통, 이모든 것들은 비록 과거로 흘러갔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간직해 왔다는 것도 하나의 존재방식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가장 확실한 존재 방식일지도 모른다.

수용소에 처음 들어온 한 동료가 하늘에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을 들었다. 자신의 고난과 죽음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스런 종말로 부터 구원받도록 해달라는 기도였다. 이런 사람에게 고난과 죽음은 의미있는 것이다. 그의 희생은 아주 심오한 의미를 지닌 희생이다. 그는 헛되이 죽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강제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인간의 영혼을 파헤치고, 그영혼의 깊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간서에서도 선과 악의 혼합이라는 인간 본연의 특성이 발견되다는 점이다. 모든 인간을 관통하는 선과 악을 구별하는 단층은 아주 심오한 곳까지 이르러 인간성의 바닥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강제수용소라는 곳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런 위험은 정신위생학적인 의미에서 잠수병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물속의 잠함에서 일하던 잠수부가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올 때 가장 위험한 것처럼 엉청난 정신적 억압을 받다가 갑자기 풀려난 사람은 도덕적, 정신적, 건강에 손상을 입을 위험이 크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 못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제 이 세상에서 신이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로고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 동시에 로고테라피는 정신질환을 일으키는 데 아주 커다란 역할을 하는 악순환 형성과 송환기재를 약화 시킨다. 그렇게 해서 정신 질환 환자에게 전형적인 자기집중증상이 발생하고 심화되는 것을 막는다.

로고스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몇년 전에 프랑스에서 설문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그 결과 89%의 사람들이 인간에게는 살아야 할 의미를 주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왔다. 그중 61%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기꺼이 그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어떤 것'과 '어떤 사람'이 있다고 대답했다.

로고테라피는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도록 도와 주는 것을 그 과제로 삼고 있다. 그렇게 하려면 환자의 실존 안에 숨겨져 있는 '로고스'를 스스로 깨닫도록 해야 하는데, 이것은 상당한 분석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런 점에서 로고테라피는 정신분석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마음의 평온을 가져오기보다는 긴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면의 긴장은 정신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최악의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딘다.'라는 니체의 말에는 이런 예지가 담겨져 있다.

이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잇는 것처럼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되어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잇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만, 한쪽 극에는 실현되어야 할 의미가 , 그리고 다른 극에서는 그 의미를 실현시켜야 할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에 실존적 역동성이다.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거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 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짊으로써' 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존재의 본질로 보고 있다.

로고테라피의 행동강령

"인생을 두번째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햇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잠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의 내면이나 그의 정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 시킬 수 잇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아실현은 자아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얻어진다는 말이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인간의 주된 관심이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데에 있다는 것은 로고테라피의 기본 신조 중의 하나이다.

나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 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일단 의미를 찾는데 성공하면 그것이 그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뿐 아니라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도 준다. 그렇다면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을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아주 치명적인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나이든 사람을 불쌍하게 여길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들을 부러워해야 한다. 물론 나이든 사람에게 미래도 없고 기회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 미래에 대한 가능성 대신 과거속에 실체, 즉 그들이 실현시켰던 잠재적 가능성들, 그들이 성취했던 의미들, 그들이 깨달았던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어느 누구도 과거가 지니고 있는 이 자산들을 가져갈 수 없다.

 

 

4. DEEP DIVE

 

가장 비참한 삶에서도 가장 고귀한 것을 일구어 낼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참 아이러니한 존재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