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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줄거리, 교훈, 책속으로

by thegreatmerchant 2025. 3. 15.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1. 줄거리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는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이자 무교회주의자인 우찌무라 간조의 신앙 여정을 담고 있는 자서전적 에세이다. 그는 1861년 일본 에도에서 태어나, 동경외국어학교와 삿포로 농업 대학을 거치며 기독교를 처음 접하게 된다. 그의 신앙은 단순한 종교적 체험을 넘어, 민족주의와 인류애를 아우르는 깊은 사유로 발전하게 된다. 

우찌무라는 기독교의 본질을 탐구하며, 예수를 단순한 종교적 인물로 한정짓지 않고, 아름다운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기독교가 단순히 개인의 구원에 그치지 않고, 사회와 민족의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념은 그가 한국의 기독교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이유 중 하나이다. 

그의 회심기는 단순히 신앙의 변화가 아니라, 그가 겪은 내적 갈등과 고뇌의 연대기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느낀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를 목격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기독교를 선택하게 된다. 그의 신앙 여정은 단순히 개인적인 체험에 그치지 않고, 그가 만난 여러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욱 풍부해진다. 특히, 그는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로의 신앙을 나누고, 그들의 신앙적 성장에 기여하게 된다. 

우찌무라 간조는 자신의 신앙을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탐구하며,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과 사유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의 회심기는 단순한 종교적 체험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2. 교훈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은 신앙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다. 우찌무라는 자신의 신앙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사회적 문제에 대한 책임을 느끼게 된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신념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우찌무라 간조는 기독교를 통해 민족과 인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 우리는 종교를 통해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사회의 발전과 인류의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의 신앙 여정은 우리에게 신앙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그는 다양한 인물들과의 교류를 통해 서로의 신앙을 나누고, 이를 통해 성장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중요한 교훈으로, 서로 다른 배경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찌무라 간조의 회심기는 신앙이 단순한 개인적 체험에 그치지 않고, 사회와 민족에 대한 책임을 동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우리가 신앙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게 한다.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사유의 기회를 제공한다.

 

3. 책속으로

 

나는 하루만에 회심하지 않았다. 내가 더 이상 우상 앞에 엎드리지 않게 된 후로도 한참 동안, 아니, 내가 세례를 받은 후로도 한참동안 기독교의 기본적인 가르침들 (지금은 나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데에 핵심적인 것이라 믿고 있는) 을 믿지 않았다. 아직도 나는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쫒아가면서도" 현실 속의 나는 예전의 이교적인 면을 모두 떨쳐 버리지는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일찍이 일기 쓰는 습관을 들였는데,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나 경험한 일은 무엇이든지 일기로 기록해 놓았다. 나는 나자신을 세심한 관찰의 대상으로 만들었고 그것은 내가 연구한 그 어떤 것보다 신비로운 것이었다. 나 자신의 부상과 진보, 실패와 퇴보, 기쁨과 희망, 그리고 죄와 어두움을 적어 놓았다. 이러한 관찰에 뒤따르는 그 모든 끔찍함에도 불구하고 이 관찰은 내가 해 온 그 어떤 연구보다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그러나 5년 후, 기독교를 받아들이라는 공식적인 제안과 함께, 지켜야 할 엄한 규칙들과 많은 희생이 제시되었을 때 나의 모든 본성은 그것에 굴복하기를 거부했다. 일 주일 중 하루는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 반드시 따로 떼어 놓아야 하며, 그 날은 다른 공부나 즐거운 일들을 해서는 안된다는 규정은 거의 불가능한 희생이었다.

기독교 국가 (미국)는 바울과 게바가 전한 것 이외에 또 하나의 복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 복음은 다른 많은 경멸스러운 가르침 가운데서도 특히 '힘이 곧 정의이고, 돈이 바로 그 힘이다.' 라고 가르치는 복음이다.

어느 중국 현자의 "산 속에 있는 사람은 산을 모른다" 는 말은 참으로 옳다. 멀리 떨어져서 보면 바라보는 대상에 대해 환상을 품게 되지만, 그 대상을 포괄적으로 바라보게 해 주기도 한다. 고로 산을 전체적으로 잘 보려면 멀리서 봐야 한다는 말이다.

참된 관용은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정직한 신앙을 허용하고 참아 주는 것이다. 진리의 일부는 알수 있다고 믿으나 모든 진리를 다 알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 태도야 말로 진정한 기독교적 관용의 기초이며, 모든 사람에게 호의를 가지고 평화롭게 대할 수 있는 원천이다. 물론 내가 이러한 건강한 시각을 하루 아침에 가지게 된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휼륭하신 원장 부인의 역할이 있었음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화창한 날이다. 영적으로 힘을 얻고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천국과 영생을 어렴풋이 느꼈다. 측량할 수 없는 기쁨이여! 이러한 거룩한 기쁨을 한순간이라도 느끼는 것은 세상이 줄수 있는 모든 기쁨을 수년간 누리는 것만큼의 가치가 있다. 나의 영적인 어두움을 갈수록 더 많이 느꼈고 나는 빛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예정 교리를 공부하고 그 중요성을 깨달았다. 깊은 감명의 시간이었다. 기쁨으로 가슴이 뛰었다. 모든 유혹이 사라지는 것 같고, 내 마음에 있는 고귀한 자질들이 흥분으로 타오른다.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내가 하나님의 상속자로 예정된,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 중 하나라면 두려움 따윈 무엇이며, 유혹자의 능력 또한 무엇이란 말인가!

한 때 큰 걸림돌이던 교리가 이제는 내 신앙의 모퉁잇돌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교리가 바로 그런 의도로 선포되었다고 믿는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면서, 자신이 선택 받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은 선택받은게 거의 확실하다. 선택받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가 이런 문제로는 괴로워하지 않는다.

사랑을 위해, 자비롭고 진지한 뜻을 가지고 남에게 줄 수 있는 자여, 그대는 위대하오.

그러나 사랑을 위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 그가 더 자비롭다고 나는 생각하오 - 미국인 가수 애들레이드 A 프록터-

나는 한때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로 완전히 설득당해서 자연 법칙 자체가 뒤집어 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고 아직도 그런 식으로 기도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도다. 내 영혼이여, 항상 선한 것을 의도하시는 그 분의 뜻에 그대의 뜻을 맞추어라. 그러면 태양을 멈추게 해서 더 많은 빛과 즐거움을 누리려는 불가능한 기도로 더 이상 씨름하지 않게 될 것이다.

신학은 실질적이며 먹거나 마실 수 있는 것이다. 너무나 실질적이고 영양가도 많아서 신학이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목마르지 아니하며, 신학이 주는 고기를 먹는 자는 배고프지 않다. 신학을 부끄러워 하는가? 그렇다, 비신학, 귀신학은 영원히 부끄러워하라. 그것을 신학교에서 가르치든, 다른 기관에서 가르치든 상관하지 말고 부끄러워하라.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면이 하나도 없는게 신학이라 칭하는 과학이라면 그건 공부할 만한 하등의 가치도 없다. 그러나 진정한 신학은 다른 모든 과학보다 더 실질적이다. 의학은 인간의 육체적인 고통을 완화해 주고, 법률학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이해 관계를 다루지만, 신학은 육체적 질병과 시민의 무질서 안에 내재된 그 원인 자체를 들여다본다. 참된 신학자는 자연히 이상주의자이지만, 몽상가는 아니다. 신학자의 사상은 수세기 후에야 실현된다. 그의 일은 마치, 완성되려면 셀 수도 없는 세월이 걸리는 건물에 벽돌 한 두개 얹는 것과 같다. 오직 정직하고 신실한 일은 결코 헛되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믿음 하나로 그는 그일에 손을 댄다.

모든 사람의 삶에는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일종의 패러다임이 있다. 사람의 성공은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이 패러다임에 자신을 맞추는 데에 있다. 오직 그 패러다임 안에서만 완전한 평화가 있다. 사람의 육체와 정신은 그 패러다임 안에 있을 때 가장 유익하게 사용될 수 있다. 사람은 종종 야망이 부족해서 그 패러다임에 도달하지 못하며, 자신의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난다. 반면에 지나친 야망은 그 패러다임을 뚸어넘게 한다. 그리하여 시스템은 망가지고 때 아닌 죽음을 맞게 된다. 인간의 선택하는 능력(자유의지)은 이 패러다임에 자신을 맞추라고 있는 것이다. 일단 자신이 타야 할 흐름을 타고 나면, 사람의 노력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데 사용되지 않고 오직 그 흐름 안에 있게 하는 데에만 사용된다. 이 흐름 안에 있는 축복은 무엇이든지 받고 즐기지만, 축복을 찾아서 이 흐름 밖으로 나가지는 않는다. 이 흐름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무엇이든지 과감하게 뚫고 지나간다. 하나님께서 그 길을 정하셨으니 움직일 수 없는 산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말지어다. 하나님께서는 그대가 타야 할 흐름을 정하셨고 선장도 정해주셨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독교라고 생각하는 것에 달려드는데, 그건 사실상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 위에 덧씌워진 상부구조들이다. 그러한 상부구조는 믿음 없는 신자들이 세운 것이다. 어처구니 없게도 그들은 '바위' 그 자체로는 세월의 힘을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위에다 성전, 성당, 교회, 교리, 서른 아홉개의 신조등 과 같이 소위 불에 쉽게 타 버릴 구조물들을 세웠던 것이다. 게다가 어떤 어리석은 이들은 그런 구조물들이 쉽게 타 버린다는 걸 알아채고는 거기에다 불을 질러 놓고 그 불길을 보고 즐거워하며 바위도 불길과 함께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라 '그 숱한 세월의 마모에도 끄떡없이' 우뚝 솟은 채 바위는 그대로 있다.

진리도 마찬가지다. 오직 진리를 따를 때에만 진리를 알 수 있다. 쪼개고 따지고 장황하게 늘어놓는 건 오히려 진리를 진리답지 못하게 만든다. 진리는 확고하고 장엄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그 진리를 우리에게로 부르지 말고 우리가 직접 진리를 향해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진리를 정의하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어리석음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것임을 왜 모르는가? '무한한 우주'외에 도대체 그 무엇이 진리를 정의하거나 한정지을 수 있단 말인가? 오로지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진리에 대한 정의는 포기하도록 하자.

이것이 바로 기독교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해 우리가 받은 속죄의 은혜를 통한 구원이 바로 기독교인 것이다. 분명 기독교는 그 이상일 수 는 있지만 그 이하일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것이 기독교의 정수다. 그리고 교황, 주교, 목사 등 그에 따르는 부속물은, 그것이 유용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기독교의 필수 요소는 아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다른 무엇보다도 가치가 있다. 참된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독교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며 평안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그토록 많은 인류를 계속해서 어두운 이교주의에 내버려 두시는지를 생각해 보았는가? 내 생각에는 어두움을 정복해 가는 그대들의 노력을 통해서 기독교가 살아 성장케 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아직도 세상에는 1억 3천 4백만의 이교도들이 있다. 그렇게 많은 이교도가 남아 있다는 게 감사할 뿐이다. 알렉산더 대왕처럼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다고 서러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교주의는 인간의 존재 양식 중에서 미지근한 상태라고 나는 늘 생각한다. "그것은 아주 뜨겁지도아주 차갑지도 않다" 무기력한 인생은 나약한 인생이다. 그런 인생은 고통을 덜 느낀다. 따라서 즐거움도 덜 느낀다. '데프로푼디스 ('깊은데서'라는 뜻의 라틴어로 매우 비참한 상태에서 외치는 소리를 일컬을 때 쓰는말) 는 이교주의의 속성이 아니다.

우리가 강해지려면 기독교가 필요하다. 하나님께는 충성을, 사탄에게는 적의를 맹세하기 위해 우리는 기독교가 필요하다. 나비 같은 인생이 아니라 독수리 같은 인생, 분홍 장미의 자그마한 완성이 아니라 참나무의 기운찬 힘을 원한다. 어린아이일 때는 이교주의만으로도 살수 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는 오직 기독교 밖에 없다. 세상은 성숙해 가고 있고, 우리도 세상과 함께 성숙해 가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기독교를 필요로하는 날이 언젠가는 반드시 올 것이다.

 

4. DEEP DIVE

One of my favorite books.

구원의 확신에 관한 가장 명쾌한 해답을 준 책. 그가 느꼈던 마음이 부담과 해갈의 기쁨이 곧 나에게도 그대로 밀려옴을 느꼈다. 이제부터는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치열한 전쟁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