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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구안록: 줄거리, 교훈, 책속으로

by thegreatmerchant 2025. 3. 15.

 


1. 줄거리



우찌무라 간조의 '구안록'은 저자의 개인적인 신앙 여정을 중심으로 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저자가 죄에서 벗어나 평안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진솔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겪었던 고난과 갈등,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한 신앙의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특히, 그는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한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개인적인 고백에 그치지 않고, 독자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며 신앙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2부에서는 '죄의 원리', '기쁜 소식', '신앙'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신앙의 본질과 그로 인해 얻는 평안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한다. 저자는 신앙이란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이나 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 진정한 평안을 찾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앙이 어떻게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설명하며, 독자에게 신앙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는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신앙의 여정을 함께 하자고 초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솔직한 고백과 깊은 성찰은 나에게도 큰 울림을 주었고, 나의 신앙 여정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2. 교훈



'구안록'에서 가장 큰 교훈은 신앙이란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진정한 평안을 찾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우찌무라 간조는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 신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신앙이란 고난과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또한, 저자는 신앙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다룬다. 그는 신앙이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도와준다고 말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난과 갈등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준다. 신앙이란 단순히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으로, '구안록'은 독자에게 신앙의 여정을 함께 하자고 초대하는 책이다. 저자의 솔직한 고백과 깊은 성찰은 나에게도 큰 울림을 주었고, 나의 신앙 여정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신앙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깊이 있게 고민하게 되었다. '구안록'은 단순한 신앙서적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3. 책속으로

 

인간은 내면의 결핍을 인식하지 못한채 늘 외부에서 만족을 찾는다. 자신의 적이 실은 자기 자신인데, 이를 알지 못하고 내면의 고통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 내안의 싸움과 갈등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 육신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

"이 세상의 불만은 하나님을 찾는 소리 없는 외침이다"

아, 비기독교적인 세상에 살면서 기독교적인 삶을 살려는 자의 고통과 눈물은 성서를 옆구리에 끼고 기도회나 강연회를 인도하거나 설교하며 그 일을 영원 전부터 정해진 천직이라 믿는, 저 부러운 인사들은 상상조차 못할 것 이다.

세상에서 자기 죄를 깨달은 기독교 신자처럼 곤궁한 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죄에 대해 무감한 기독교 신자처럼 강한자도 없을 것이다. 전자는 전전긍긍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후자는 대담무쌍하여 무엇이든 다 한다. 죄에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는 다 교회로 오라! 정의와 거룩을 방패삼아 죄를 범하려는 자도 다 교회로 오라! 이런 사회와 이런 교회에서는 아무리 죄를 범하지 않으려 해도 범할 수 밖에 없다. 마치 춘추전국시대에 태어난 사람이 전쟁이 죄인 줄 알면서도 싸울 수 밖에 없는 것과 같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자기만을 구하려 애쓰는 자는 멸망에 이른다. 게으름은 죄 중의 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곧 악을 행하는 것이다. 시간을 죽이는 일도 사람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다. 공이 없는 일생은 죄스러운 삶이다.

나는 나, 너는 너라는 비정한 세상의 정신을 기독교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 손에서 악인의 피를 대속하기를 요구하신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인류연대책임론은 기독교의 교리이자 오늘날 사회학의 결론이기도 하다.

나는 죄라는 이 엄청난 문제를 누군가에게 의지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나는 이 문제를 혼자서 풀어보려고 결심했다. 사람은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만일 벗어날 수 있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이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할수 없을 것이다.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루 종일 기도해도 은혜를 받지 못했고, 이틀이 지나도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 목사에게 가서 물어보았더니 내 열심히 부족한 탓이라고 했다. 하여 나는 억지로 울고 부르짖으며 은혜를 입고자 했다. 그래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나는 기도했다. " 주여, 주여, 들어주시옵소서, 다른 이들을 구하셨듯이 저도 구해주소서"

급변설은 먼저 지질학과 생물학에서 배제되었고, 나중에는 사회학과 역사학에서도 배제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사유의 결과로, 관찰의 결과로, 심리 실험의 결과로, 종교의 영역에서도 급변설이란 별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심령의 발달을 식물의 발생 순서에 비유한 것으로, 극적 변화를 부인하는 것이다.

 

진리는 내가 호흡하는 공기나 날마다 마시는 물과 같다. 그 효과는 확고하나 그 작용은 고요하고 더디다. 진리는 극약이 아니다. 진리는 겨자씨처럼 계속해서 자란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진리다. 루터는 이 말을 듣고 일어섰고 버니언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안심했다. 그러나 루터를 루터 되게 한 것은 단순히 스승 슈타우피츠의 한마디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3,4년간 수도원에서 홀로 사색하고 기도하는 세월이 필요했다. 감정적인 버니언조차 속죄의 큰 진리를 깨달은 후 12년간 베드퍼드셔 감옥에서 연단되는 시간이 필요했다. 큰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는 내가 이를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간에 일대 진보하는 때다. 이와 반대로 아무리 큰 감동을 받고 아무리 많은 눈물을 흘려도 우리의 이성을 움직이지 못하는 변화는 머지않아 사라지고 만다.16세기 프로테스탄트 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감정적 혁명이 아니라 합리적 혁명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단지 아무 생각 없이 무모하게 행동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와는 무관하다. 인간이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지으려면, 그에 앞서 악이 침투해 그 사람을 영적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친 후 완전히 장악해야 한다. 그제야 인간은 이 죄의 원리를 의도적으로 이해하고 체득할 수 있게 된다....인간의 발달 조건에 따르면 선과 대조되는 악이 이 정도로 강해지려면 한 사람의 내면생활이 도덕적 선을 매우 가까이 경험한 다음에야 가능하다. <기독교 죄론, 윌리엄 어웍>

시인은 타고난다고 한다. 전도자를 길러내는 것 역시 하나님이 아니고는 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세상에서 위대한 종교가라 일컫는 사람은 도리어 신학교 출신이 많지 않다. 하나님의 사람인 디셉 출신 엘리야는 길르앗의 야인이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천직을 물려주려 택한 후계자는 소 열두 거리를 몰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였다. 다니엘은 관리였다. 아모스는 드고아의 농부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 세상을 구하려 할때 그리스도를 힐렐이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우게 하지 않고 도리어 나사렛 벽촌에 두었다.

나는 농업으로 내 직업을 삼을 수 있다. 그리고 역사를 가르쳐 밥벌이를 한다 해도 조금도 양심의 거리낌이 없다. 그러나 신학을 내 직업으로 삼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물론 노력을 교환한다는 측면에서는 신학으로 생활한다 해도 도의적 잘못은 없다. 하지만 그 폐단과 위험을 고려해보면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하다. 그러한 폐해를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바울 역시 교역자가 적당한 보수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자신은 천막 제작을 업으로 삼았다. 퀘이커교에서 교역자의 봉급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는 깊은 이유가 있다.

사유 속에서 죄라는 관념을 벗어던짐으로써 온몸이 죄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이 타조의 미련함을 따르는 사람이다. 세상에서 죄라고 하는 것 중에는 죄가 아닌 것도 있지만, 죄라는 관념은 죄가 존재한 후에 생겨난 것이다. 죄에서 벗어난 후에야 비로소 죄를 생각하지 않게 된다. 죄를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분노는 내 본성중의 하나다. 이러한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가 천사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증거다. 그렇다면 분노하는 것이 죄는 아니지 않을까? 어떤 사람이 아무 이유도 없이 내 권리를 침해한다면 내가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이런 분노를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감정이 복수심으로 발전해 악을 악으로 갚으려 한다면 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쉽게 내 불완전함과 죄를 분별할 수 있다. 불완전함이 죄가 될 수는 없다. 도리어 그 불완전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다.

사람의 의지를 움직이는 것은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학문적 이론이 아니라 신선하고 온화한 감정이다. 강단에서의 교훈이 아니라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감화다. 도둑질해서는 안된다는 윤리학의 이론이 아니라 훔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줄 아는 종교적 관념이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기독교는 사람을 선한 그릇으로 만들어 철학자들이 시인의 몽상이라고 생각했던 최대의 갈망을 채워주겠다고 선언한다. 내가 만일 기독교에서 이런 완전에 이르는 길을 찾지 못했다면 나는 아직 기독교를 모르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는 큰 뜻을 품어야 한다. 인도의 선교사 윌리엄 케리는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계획하고 하나님께 큰일을 기대하라" 고 했다. 우리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엄청난 변화가 내 몸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자들이다.

선이 하나님이라면 악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다. 도둑질, 살인, 간음은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지 죄 자체가 아니다.

내가 살인했을 때 국법이 나를 벌하는 것은, 단순히 내가 살인죄를 범했기 때문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내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죄를 범하려 해도 범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죄 된 생각 자체가 내 안에 없게 된다. 내가 불완전하고 남의 험담을 하고, 욕정에 끌려 행동하고, 교만하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모두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여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선인이 될 수 있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이 길 뿐이다.

인류는 타락하기 전에 참으로 어린아이 같았다. 그들은 지식도 없었고 옷이나 집도 없어서,외형은 오늘날 남태평양 원주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문명 세계의 현대인이 타락 이전의 인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딱 하나 있다. 아담과 하와는 어린아이가 자애로운 어머니한테 매달리듯 하나님을 의지했다. 그런데 현대인은 철학자든 정치가든 종교가든 거의 다 자기 지식에 의지해 살며, 하나님을 아는 자가 있다해도 하나님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하는 사람이 없다.

이익이나 필요에 따라서가 아니라 귀공자의 늠름한 여유 속에서 남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잊고, 이겨도 자랑하지 않고 져도 실망하지 않으며, 일하며 쉬고 쉬면서 일하고, 생애를 즐기면서 하나님과 조국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내가 이상으로 여기는 사람이 되는 길이 이 넓은 우주에 없단 말인가...아, 내 일생은 고통의 일생이요, 나는 아라비아 이야기에서 처럼 세상이라는 절벽의 중간에 생명이라는 한 줄기 뿌리에 매달린 채 밑으로는 입을 벌려 내가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죽음이라는 큰 뱀을 두고 있는데 세월이라는 쥐가 어느새 가느다른 뿌리를 갉아먹고 있다. 이 위험한 처지에서 아내와 자식이라는 풀이 우거져 두려움 속에서나마 간신히 달콤함을 맛보는 모습이, 영원한 희망을 가진 내가 누릴 수 있는 전부란 말인가. 아, 사람의 소리 없는 외침을 모을 수 있는 기계가 있어 우리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 비애의 소리는 하늘을 찢고 땅을 뒤흔들고도 남을 것이다. 아, 나를 구해줄 가는 없는가.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는가. 우주는 절망 위에 세워졌는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가. 사람은 버림 받았는가.

신앙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게 아니다. 둘에 둘을 더하면 다섯이 된다는 말은 이 우주가 사라진다 해도 믿을 수 없다. 거짓말이 선이라는 것 역시 내가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믿을 수 없다. 또 믿어서도 안된다. 거짓된 방법으로 사람을 선한 길로 인도할 수 있다며 어떤 근거를 들이대도 나는 믿을 수 없다. 신앙은 믿을 만한 것을 그 어떤 두려움이나 주저함 없이 믿는 것이다.

진리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사슴은 사슴이요 말은 말인 줄 알면서도, 권력에 아첨할 때는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지 않던가. 둘에 둘을 더하면 넷이 되는 줄 알지만,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1000원짜리 물건 두 개를 5000원에 팔지 않는가. 지조 없는 설교자도 진리가 최후에 승리한다고 부르짖지만 과연 몇이나 이를 진심으로 믿고 그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가. 정의의 하나님이 계시다고 장담하는 그리스도인 중에 진심으로 이 진리를 믿고 그 길을 걷는 자가 몇이나 되는가. 그리스도의 말씀은 틀림이 없다.

종교적 신앙을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라 착각하는 사람은 신앙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사람이다. 그것이 참된 신앙이 아님을 성서가 충분히 증명하고 있으며 언어학적으로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기초는 진실이다. 진실 없이는 신앙도 없다. 신앙의 반대는 거짓이요, 허망이요, 무정이요, 불친절이요, 허식이요, 빈 소리요, 불충이요, 불효요, 불의요, 권모요, 술수다. 신앙에도 반도적적 의미가 꼬리표처럼 따라붙게 된 것은 사람의 마음이 경박해짐에 따라 정직이 미련한 것으로 무시당하고, 학문이 세속에 아첨하는 도구가 되면서부터다.

그래서 나는 내 죄가 확실히 용서받은 증거가 필요하다. 참으로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는 증거가 필요하다. 잘된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판별하기 어려운 이 세상도 실은 잘된 것이며, 정의의 하나님이 이끄신다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다. 그렇다.

그때 한 음성이 내 전신에 스며들듯 들려왔다. "너의 제물을 내가 받았다. 너는 낡은 옷을 벗고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의의 옷을 입으라" 나는 대답했다. "당신의 종이 여기 있습니다. 당신의 뜻을 따라 제게 은혜를 베푸소서" 이때 나는 의가 그리스도에게서 내게로 흘러들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환희와 평화아 감사가 번갈아 내 마음에 충만해져서 도저희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곧 사람이 없는 숲 속, 후루루비쭉새가 둥지를 틀고 양의 울음소리마저 아득히 들리는 곳을 찾아, 맑은 개울가에 홀로 꿇어 앉아서 감사 기도를 드렸다. 이제 내 기도에는 내 필요를 간구하는 말이 사라지고, 다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선물 곧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이었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망설이며 수년간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 영토를 유지하고 공물을 바치면서 군주로서의 권력을 보존했다. 그러나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궁핍해지자 영토 봉환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 자존심을 내려놓고 윤리학자의 조롱을 받으며 드디어 내 몸과 영혼과 욕심과 소원과 사랑과 의지까지도 모두 하나님께 넘겨주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보라 비소로 나는 부유해졌다. 생명은 얻으려 하면 잃고 잃어버리면 얻는다. 나는 나를 버려 비로소 나를 얻었다. 온몸을 드리자 지난날 벌었던 수입의 10분의 1이 아니라 하나님과 온 우주와 영원을 댓가로 받았다.

영토를 봉환한 이후의 내 삶은 참으로 기쁘고 평온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 뿐이다. 모든 선한 것은 내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믿음에 대한 상으로 주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엄청난 것도 청구 할 수 있는가 하면, 그분은 내 노동한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대가를 선물로 주신다. 의식주에 대한 염려가 이제 내 마음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의무를 입에 달고 사는 자는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 아니다. 의무라고 생각하면 무거운 짐이 되고 마음이 눌려 그만큼 활동력은 저하되고 만다. 아무리 재미있는 공부라 해도 필수 교과목으로 강요당하면 꿀맛 같던 그 맛도 쓴맛으로 변하고, 아무리 고상한 일이라도 의무감으로 하면 무미건조하게 노예처럼 일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큰 사업가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이미 뜻한 바를 다 이룬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겨졌기에 구태여 사람들에게 명예를 구걸할 필요가 없다. 억만장자라서 돈을 더 벌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경제계에서 늘 승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명장은 반드시 이길 싸움이 아니면 나서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그는 싸움터에 나가 쾌활하고 자유롭게 그리고 여유롭게 싸우면서 적을 곤경에 빠트린다고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미 이루셨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면서 부터 노동을 해도 큰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 헤라클레스 같은 힘과 능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서 생긴다.

내가 십자가를 믿지 못했던 이유는 그 까닭을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십자가의 대속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면 신경증에 가까운 부흥회와 무슨 차이란 말인가. 나는 합리적인 종교를 찾고 있었기에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믿을 수가 없었다. 진리를 믿어 괴로워하는 편이 낫지, 미신을 믿어 안일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태평한 캐세이에서 천년 사는 것보다 동요하는 유럽에서 1년 사는게 더 낫다" 나는 진리를 희생해서 까지 평안을 구하고 싶지는 않았다.

죄의 용서는 용서하는 자와 용서 받는자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용서 받는 자는 생각으로만 뉘우치지 말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리고 용서하는 자도 마음으로 용서할 뿐 아니라 실제로도 사면해 주어야 한다. 회개의 열매와 사면의 알맹이 이 둘이 함께해야 비로소 죄가 용서된다. 하나님이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는 죄를 용서하시지 않듯이 우리도 사면을 보증하지 않는 사면은 믿을 수 없다. 이는 우리의 신앙이 부족해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하늘에서 받은 이성이 요청하기 때문이다. 신약성서가 하나님의 게약을 중요시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이 인류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증거이다. 즉 그리스도의 속죄란 하나님이 우리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의 결과이다.

물론 그리스도가 당한 육체의 고통은 심령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죄의 은혜는 그의 육체적 고통에서가 아니라 심령의 고통에서 나온다. 갈보리 산이 아니라 겟세마네 동산 이야말로 인류의 죄가 사해진 곳이다.

나를 목적지까지 태워준 이는 기관사이다. 나를 기관사에게 맡긴 이는 나 자신이다. 나를 구하고 나를 천국에 보내는 이는 그리스도다. 나를 그리스도에게 맡긴이는 나 자신이다. 이것이 성서에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는 말의 뜻이다. 그러므로 "속죄의 교의를 믿는 자를 무책임하게 만든다"는 비판은 전혀 근거 없는 말이다.

은혜로운 음성이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인내는 크시도다. 그는 괴로워하는 자기 자녀를 보시면서 오히려 견디신다. 하나님이 너를 구하지 않은 것은 너를 구하려 했기 때문이다. 반생 동안 이어진 너의 방황과 번민은 네가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를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너를 괴롭힌 것은 너 자신이다. 나를 의지하라. 나는 네 죄를 용서해 선에서 선으로 이끌어 네가 나를 위해 세상을 구하는 힘이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라고 댇답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내 믿음마저도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기독교 신자는 쉴새 없이 기도해야 한다.

그렇다. 신자의 생명은 기도다. 아직 불완전하므로 기도할 것이다. 아직 믿음이 부족하므로 기도할 것이다. 아직 기도를 잘하지 못하기에 기도할 것이다. 은혜를 받아도 기도할 것이다. 저주를 받아도 기도할 것이다. 하늘에 올라가도 음부에 떨어져도 나는 기도하리라. 힘없는 나, 내가 할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뿐이다.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깊은 한밤중 한 어린아이가 울고 있네

어둠 속에 빛을 찾아 어린아이가 울고 있네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울고만 잇네

해제 중

자기를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이 '자기 중심성'이야말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근원임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실리 총장의 한마디가 우치무라에게 결정적인 전기가 되었다. "우치무라, 자네는 자네 마음속만 보니까 안되는 거야. 자기 밖을 보아야 해. 왜 자기 성찰을 그만두고 십자가에 달려서 자네 죄를 용서해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가? 자네는 어린아이가 나무를 화분에 심어놓고 그 성장을 보려고 매일 그놈을 뿌리째 뽑아보는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있네. 왜 하나님과 햇빛에 맡기고, 안심하고 자네의 성장을 기다리지 않는가?" 전형적인 속죄 신앙을 표현하는 이 한마디가 1886년 3월 8일 우치무라의 회심의 기반이 되었다.

 

 

4. DEEP DIVE

아직 영토를 봉환하지 않은 영주. 그것이 지금 내 모습. 지금의 상태로는 안(安)을 구(求)할수 없을 것 같다. 내 의지와 이성을 내려놓을 수 있는 지점이 바로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곳. 하지만 나는 얼마나 더 단련되어야 할까... 백여년전 한 처절한 일본 신학자의 생각에서도 나의 모습이 느껴지는 것 같은 동질감을 느끼는 수준에서 나는 어렴풋이 安을 느낀다. 그나마 다행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