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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줄거리, 교훈, 책속으로

by thegreatmerchant 2025. 3. 11.

 

월든
월든

 

1. 줄거리



헨리 데이빗 소로의 『월든』은 1845년부터 1847년까지의 2년간, 그가 매사추세츠주 월든 호숫가의 숲속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간 경험을 담은 수필집이다. 소로는 당시의 물질문명과 사회적 관습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의 단순한 삶을 선택하였다. 그는 자신의 작은 오두막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였다. 이 책은 그가 자연에서의 삶을 통해 깨달은 철학적 사유와 관찰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로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서의 고독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였다. 그는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삶의 중요한 동반자로 여겼으며, 이를 통해 인간이 잃어버린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물질적 풍요가 아닌 정신적 풍요를 강조하며, 현대 사회의 소비주의와 물질적 욕망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소로는 자연 속에서의 삶을 통해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고, 그 과정에서 얻은 통찰을 독자와 나누고자 하였다.

『월든』은 단순한 자전적 에세이가 아니라, 인간 존재와 자연, 그리고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소로는 자연의 변화를 세심하게 관찰하며, 그 속에서 인간의 삶과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하였다. 이 책은 독자에게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제안하며, 물질적 욕망을 초월한 진정한 행복을 찾는 여정을 함께 하도록 이끈다.

 

2. 교훈



『월든』에서 소로가 전하는 가장 큰 교훈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의 중요성이다. 현대 사회는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을 추구하지만, 소로는 이러한 삶이 인간의 본질을 잃게 만든다고 경고한다. 그는 자연 속에서의 단순한 삶을 통해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독자에게 자연과의 관계를 재정립할 것을 권장한다. 소로는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교훈을 통해, 우리가 잊고 지낸 삶의 본질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소로는 물질적 욕망을 초월한 정신적 풍요를 강조한다. 그는 소비주의 사회에서 벗어나, 자아를 발견하고 진정한 가치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현대인들은 종종 물질적 소유에 집착하지만, 소로는 이러한 집착이 오히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경고한다. 그는 자급자족의 삶을 통해, 물질적 소유가 아닌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소로는 고독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는 자연 속에서의 고독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깊은 사유의 시간을 가졌다. 현대 사회에서는 고독이 부정적으로 여겨지지만, 소로는 고독이 오히려 인간의 내면을 풍요롭게 하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그는 독자에게 고독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을 시작하라고 권장한다.

『월든』은 단순한 자연 에세이가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소로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독자에게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 물질적 욕망의 초월, 고독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자연 속에서의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물질적 풍요가 아닌 정신적 풍요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3. 책속으로

우리는 너무나도 철저하게 현재의 생활을 신봉하고 실면서 변화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 "이 길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어." 하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원의 중심에서 몇 개라도 다른 반경을 가진 원들을 그릴 수 있듯이 길은 얼마든지 있다. 생각해보면 모든 변화는 기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기적은 시시각각으로 일어나고 있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곧 참되게 아는 것이라."라고 말했다. 한 사람이 상상 속의 사실을 오성속의 사실로 바꾸어놓을 때 모든 사람들은 드디어 그 기초 위에 자기의 인생을 세울 것으로 나는 내다본다.

'자발적인 빈곤'이라는 이름의 유리한 고지에 오르지 않고서는 인간 생활의 공정하고도 현명한 관찰자가 될 수 없다. 농업, 상업, 문학, 예술을 막론하고 불필요한 삶의 열매는 사치일 뿐이다.

오늘날 철학 교수는 있지만 철학자는 없다. 삶다운 삶을 사는 것이 한때 보람 있는 일이었다면 지금은 대학 강단에 서는 것이 그렇단 말인가?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심오한 사색을 한다거나 어떤 학파를 세운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너무나도 사랑하여 그것의 가르침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 너그럽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자가 되는 것은 인생의 문제들을 그 일부분이나마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뜻한다. 위대한 학자들과 사상가들의 성공은 군자답거나 남자다운 성공이 아니고 대개는 아첨하는 신하로서의 성공이다. 그들은 자기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타협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기 때문에 보다 고귀한 인간류의 원조는 될 수 없는 것이다.

미개인들은 저마다 최상의 주택에 못지않은 집을 한 채씩 가지고 있고, 이 집은 소박하고 단순한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기에 충분하다. 하늘을 나는 새는 둥지를 가지고 있고 여우는 굴을 가지고 있으며 미개인들도 오두막을 가지고 있건만, 현대의 문명사회에서 자기 집을 가지고 있는 가정은 반수도 안 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닌 것이다. 특히 문명이 위세를 떨치고 있는 대도시에서는 자기 집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집 없는 나머지 사람들은, 여름철이나 겨울철이나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되어버린 이 주택이라는 이름의 겉옷에 대해서 해마다 세를 물고 있다 .그런데 이 세는 인디언의 오두막 마을 하나를 살 수 있을 만한 금액이지만 현재는 그들을 죽는 날까지 가난 속에 허덕이게 만드는 요인이 되어 버렸다. 나는 여기서 집을 소유하는 것에 비해 빌려 사는 것의 단점을 역설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개인들은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에 자기 집을 소유할 수 있는 반면에, 문명인들은 자기 집을 소유할 여력이 없기 때문에 세 들어 사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빌려 사는 형편마저 세월이 지난다고 해서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이제 자기가 쓰는 도구의 도구가 되어벼렸다. 배가 고프면 마음대로 과일을 따먹던 인간이 이제는 농부가 되었고, 나무 밑에 들어가 몸을 가렸던 인간이 주택의 소유자가 되었다. 우리는 야영하면서 밤을 보내던 생활을 청산해 버렸다. 땅 위에 정착하고 나서 하늘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기독교를 단지 진보된 토지 개간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현세를 위해서는 가족의 저택을 마련하고 내세를 위해서는 가족 묘지를 마련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사회가 학생들의 값비싼 놀이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동안 학생들은 인생을 '놀듯이 보내거나' 또는 인생을 '공부만 하지'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을 진지하게 '살아'보라는 것이다.

모든 점에서 소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나라, 즉 '철학자의 나라'가 있다면 동물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큰 실수는 결코 범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철학자들로 이루어진 나라는 과거에 없었다. 또한 가까운 장래에 생길 것 같지도 않으며, 그런 나라가 있는 게 바람직한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 같으면 말이나 소를 길들여서 무엇인가 내 일을 거들 수 있도록 하숙생으로 받아들이지는 않겠다. 잘못하면 내가 마부나 목동신세가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리고 설사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가 덕을 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갑의 이득이 을의 손실이 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으며, 미구간지기 소년이 그의 주인만큼 만족을 얻을 이유가 있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내가 2년 동안의 경험에서 배운 것은, 첫째로는 이처럼 높은 위도에서도 사람이 필요한 식량을 얻는 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적은 노력밖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둘째로는 사람이 동물처럼 단순한 식사를 하더라도 체력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콩밭에서 캐낸 쇠비름을 끓여서 소금을 친 것만 가지고도 만족스러운, 정말 여러 면에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 여기서 쇠비름의 라틴어 이름을 적는 것은 그 이름이 풍기는 향미 때문이다. 진실로 말하건대,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평화스러운 보통날 점심때 풋옥수수를 넉넉히 삶아 거기에 소금을 좀 뿌려 먹는 것 말고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나는 5년 이상을 이와 같이 오직 육신의 노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해왔다. 그 결과, 1년 중 약 6주일간만 일하고도 필요한 모든 생활 비용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름의 대부분과 겨울 전부를 나는 순전히 공부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었다. 한때 나는 학교 경영에 온갖 노력을 기울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비용이 수입과 맞먹거나 초과하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교육자다운 사고와 신념을 가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직업에 맞는 복장을 하고 준비를 해야 했으며 그 외에도 시간을 많이 빼앗겼던 것이다. 또한 같은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서가 아니고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므로 그것부터가 실패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얽매임이 없는 자유이고,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더라도 나는 행복하게 살아나갈 수 있으므로 값비싼 양탄자나 다른 호화 가구들, 맛있는 요리 또는 그리스식이나 고딕 양식의 주택 등을 살 돈을 마련하는 데에 내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이런 것들을 얻는 것에 하등의 거리낌을 느끼지 않고, 또 일단 얻은 다음에 그것들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있다면 그 사람들이나 실컷 그런 것들을 좇으라 하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일하는 것 자체가 좋아서 일을 열심히 하는 것같이 보인다. 또는 일을 하지 않으면 나쁜 길에 빠지니까 일에 몰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현재로써는 할 말이 없다.

요컨대 나는 신념과 경험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가 소박하고 현명하게 생활한다면 이 세상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단순한 민족이 생계상 늘 하는 일을 인위적인 민족은 이제 오락으로밖에 할 수 없게 된 것과 같다고 하겠다. 땀을 쉽게 흘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구태여 이마에 땀을 흘려가며 밥벌이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아침은 언제나 나의 생활을 자연 그 자체처럼 소박하고 순결하게 지키라는 초대장과도 같았다. 나는 옛 그리스 사람들처럼 항상 새벽의 여신을 숭상해왔다. 나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호수에서 멱을 감았다. 이것은 하나의 종교적 행사였으며, 내가 행한 최선의 일 중 하나였다. 중국 탕왕의 욕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날마다 그대 자신을 완전히 새롭게 하라. 날이면 날마다 새롭게 하고, 영원히 새롭게 하라."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으며,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으려고 했으니, 삶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정말 불가피하게 되지 않는 한 체념의 철학을 따르기는 원치 않았다.

독서를 잘하는 것, 즉 참다운 책을 참다운 정신으로 읽는 것은 고귀한 '운동'이며, 오늘날의 풍조가 존중하는 어떤 운동보다도 독자에게 힘이 드는 운동이다. 그것은 운동선수들이 받는 것과 같은 훈련과, 거의평생에 걸친 꾸준한 자세로 독서를 하려는 마음가짐을 요한다. 책은 처음 쓰였을 때 처럼 의도적으로 그리고 신중히 읽혀야 한다.

아, 아침공기! 만약 사람들이 하루의 원천인 새벽에 이 아침공기를 마시려 들지 않는다면, 그것을 병에 담아 가게에서 팔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아침 시간에 대한 에매권을 잃어버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아침 공기는 아무리 차가운 지하실에 넣어둔다고 해도 정오까지 견디지 못하도 그 전에 벌써 병마개를 밀어젖히고 새벽의 여신을 따라 서쪽으로 날아가 버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4. DEEP DIVE

 

내 속에 약간의 허무주의와 인생사에 대한 덧없음이 있기에 때로는 이런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자연주의 철학자의 책이 땡긴다. '나는 자연인이다'와 같은 삶이지만, 그 안에 철학의 내용과 깊이를 더했기 때문에 같은 자연에 살아도 누구는 그냥 밥만먹고 사는 자연인으로 불리고 누구는 자연주의 철학자라 불리는 것 같다.

하지만, 무식한 나로서는 이 책이 너무 어렵다. 벌써 3번씩이나 반납일을 연기하며 읽어보려 했지만, 절반도 다 읽지 못하고 잠시 휴식 중. 몸에 좋은 것도 내 수준과 역량이 되어야 소화를 시킬 수 있는 것 처럼 이 책은 아직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다소 버거운 것 같다. 그럼에도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동경하는 삶의방식을 지원하는 든든한 지원자를 만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마치 이 험한 세상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고자 할 때 C.S.Lewis 처럼. 주변의 산 사람들의 숨결보다 때로는 죽은자들의 불멸의 책이 삶에 더 큰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